“ 朝鮮王朝實錄 ”
제1대 태조
이성계가 1392년 朝鮮을 건국 후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성계는 태상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방원에게 玉璽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주(함흠)에 머물렀다. 이때 방원이 問安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때마다 죽여버려 ‘함흠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제2대 세종
稀代의 名宰相 황희와 맹사성 황희는 分明하고 正確하고 剛直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纖細했다. 그래서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部分은 황희에게 맡겼다.
제7대 세조, 생살부(生殺符)
조선은 根本的으로 왕을 중심으로 한 王道政治를 標榜하고 있는 나라였다. 때문에 政治勢力은 언제나 王族을 등에 업거나 또는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는 大義名分을 얻기가 힘들었다.
세조는 內容에 상관없이 자신을 批判하는 勢力은 가차 없이 제거하고, 反對로 자신에게 僕從하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寬待했다. 좌장 권람은 책 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고적을 찾아다니며 학문은 쌓았고, 한명회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삼는다.
그는 “남자로 태어나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라고 약속했다. 한명회는 謀士에 能하고 策略에 뛰어난 果斷性 있는 性品의 소유자다. 신숙주는 ‘大義를 따르는 果斷性있는 人物, 幾回에 능한 變節者로 評價’
제11대 중종
서경덕은 ‘학문은 하는데 먼저 格物을 하지 않는다면 책은 읽어서 어디에 써먹겠는가’, 그는 물질에 대한 끊임없는 사색에 있었다. 그는 물질의 힘이 영원하다고 믿었으며, 물질의 분리는 단순히 형체의 분리이지 힘의 분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는 서구의 에너지 보존법칙과 비교된다.
죽음조차도 생물에 일시적으로 머물러 있던 기(에너지)가 우주의 기에 환원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생사일여(生死一如)를 주장함으로써 우주와 인간, 우주와 만물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이론을 정립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기철학의 중심에 자리한다.
제15대 광해군
광해군은 허균을 보고 “그대의 충성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있다.”라고 했다.
제22대 정조
신세계를 염원한 석학 박제가는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과거의 제도와 관습에 사로잡혀 안일한 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곤 했다. 그러자 그러한 권력층과의 이러한 대립은 결국 그의 말로를 불행으로 몰고 갔다.
제27대 순종
친일 세력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매국 단체인 ‘일진회’ 시파(時派)는 시류에 영합한다. 벽파(僻派)는 시류는 무시하고 당론에만 치우쳐 있다.
조선 정치사를 볼 때 이른바 성군 내지는 명군으로 일컬어지는 왕들 역시 자신의 정적 세력 제거에는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태종과 세조였다.
저자 박영규의 農工行商의 고정관념을 나타내는 글 ‘또한 무관의 자제들은 활도 쏘아보지 않고 오로지 가문의 덕을 입어 벼슬길에 오르기도 했다.’라는 단어의 사용. 끝.
사진출처: '10.3.21 '11.10.14 2013.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