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함양서 동시에 사진전 여는 작가 배병우
“해 오신다, 일 나가자.”
사진가 배병우(59)씨 목청이 새벽 공기를 흔들었다.
24일 오전 5시 45분 경남 함양군 봉전리 ‘아름지기 함양한옥’ 사랑채 앞뜰. 빨강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배씨는 눈곱 떼며 부스스 일어난 일행을 재촉했다. “사진가는 한마디로 햇빛 노동자라. 해 가 버리면 공치는 날”이라며 앞장섰다. 마을 앞 동호정(경남 문화재 자료 제381호) 너럭바위 안쪽 소나무 숲을 찍으러 나선 사진가 뒤로 ‘배병우 따라하기’를 일삼은 손님 아홉이 따라나섰다.
“1990년대엔 주로 경주 남산 소나무를 찍었죠. 요즘은 남산에 안가요. 일찌감치 올라가도 소나무 찍겠다고 진을 치고 있는 사진가들이 벌써 수십 명이에요. 난 다른 소나무 찾아 전국을 떠돌고 있죠.”
6시 30분 송림(松林)은 인간무리처럼 숨쉬고 있었다.
말없이 삼각대를 세운 배씨는 기다린다. 그가 좋아하는 안개는 아직 마을 앞 산봉우리 문필봉을 감싸고 흘러올 줄 모른다. 무릎을 꿇고 소나무를 올려다보던 사진가는 두툼한 나무 밑동을 만지며 “잘 생겼다” 한마디 한다.
“이 시간 언저리 소나무 숲에 들어오면 영기가 느껴져요. 안개 낀 송림은 오래 전 원시림을 떠오르게 합니다. 빛이 시작하는 이 때 여기 있으면 행복해요. 일종의 토테미즘이랄까, 소나무교(敎)라고 불러도 좋겠죠. ‘성스런 나무’는 제가 독일에서 낸 사진집 제목이고도 하고요.”
배병우씨는 다시 렌즈를 들여다봤다. 셔터 위에 올려져있는 손가락은 아직 침묵이다.
곧바로 오르지 않고 어찌 살아가야 할까 고민한 듯 살짝 비틀며 상승한 소나무들이 그런 배씨를 지켜보고 있다. 배병우식 소나무 찍기를 따라하려 마른 침을 삼키며 대기하고 있던 아마추어 사진가들도 그의 눈, 그의 손, 그의 서성거림을 바라본다.
“소나무 숲은 저를 살아 숨쉬게 하는 것, 요동치게 하는 것, 흐르게 하는 것이죠. 첼리스트 양성원씨가 제 소나무 사진을 보고 ‘작곡가 베토벤이다’라고 했어요. 우리 조상은 소나무를 사람처럼 대접했죠. 왕릉 언저리에 심는 소나무는 베는 게 아니라 섬기는 소나무였어요. 왕의 영혼이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라고요.”
배병우씨의 소나무 사진이 세계 무대로 나선 건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다. 팝스타 엘튼 존이 그의 작품을 3000만원에 사들인 일을 신호로 유럽의 안목있는 소장가들이 ‘미스터 파인 트리(미스터 소나무라는 배씨의 별명)’를 선호했다. 배씨 스스로는 “시대의 운이 따랐다”고 겸손한 분석을 내놨다. 한국의 국력이 커지면서 한국 작가를 향한 관심과 평가가 후해졌다는 것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사람들 걱정도 한몫했다. 소나무가 대표하는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번지면서 그의 소나무 사진을 한 점 사서 곁에 두고 싶어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고요한 새벽 숲 속에 가녀린 셔터 소리가 울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소나무 하나가 사진가의 영혼을 타고 필름 속으로 날아들었다. 자연은 크지만 그를 좇는 인간의 마음 또한 큼직하다. 그가 사랑하는 미명의 햇빛이 웃음을 띠는 순간, 햇빛 노동자는 소리쳤다. “해 가신다. 찰나다. 인생이 그렇다.”
함양(경남)=정재숙 기자
▶배병우 전=10월 1일~12월 6일 덕수궁미술관. 02-2188-6000(www.moca.go.kr)
▶배병우 함양 사진전=9월 24일~12월 31일 ‘아름지기 함양 한옥’, 02-733-8374(www.arumjigi.org).
◆배병우는=1950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미대 응용미술학과와 같은 대학원 공예도안과를 졸업했다. 고향 선배 권유로 사진을 시작한 뒤 독학했다. 유년시절부터 집 앞 바다와 뒷산 소나무에 사로잡혔다. 의식 깊이 박힌 그 원초적 풍경은 40여 년 그가 좇는 일종의 바람이자 생명력이다. 그는 “내가 본 소나무는 반도의 등뼈인 태백산맥의 피와 살이었다”고 말한다. 그에게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존재다. ‘종묘’ ‘창덕궁’ 등 한국의 왕릉과 ‘앙코르와트’ ‘알람브라궁전’ 등 외국 유적지를 정갈하게 담은 사진으로도 이름이 났다. 국제 미술시장, 특히 유럽 미술애호가들이 좋아하는 한국 사진가로 평가받는다. 현재 서울예술대학 사진과 교수다.
사진: 사진가 배병우씨는 원시시대의 생명력을 돌이켜보게 하는 안개 속 새벽 소나무를 찍는다. 310X160㎝, 2007, c-print.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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